일본의 대미관
일본의 대미관
  • 우수근 콘코디아 국제대학 대외교류 부총장
  • 승인 2021.02.0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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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근의 한중일 삼국지

일본은 과연 어떠한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 대략적인 윤곽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일본의 철저한 대세주의적 영합관이 있다.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1인자를 추종하는 성향이 강한 민족이다. 언감생심 1인자처럼 무대 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1인자에 복종하는 대가로 떨어지는 2인자의 떡고물에 자족한다. 2인자 속성이 잘 어울리는 민족인게다. 일본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을 보자.그러게 제 분수를 모르고 덤비면 다친다고 하지 않던가. 기껏 2인자밖에 못하면서 천하패권을 노렸으니 참패당할 수 밖에…

일본의 2인자 추구 전통은 유구하다. 그들은 대세가 바뀌면 시류에 따라 나막신을 요리조리 돌려 신으며 새 패자를 주인 맞듯 하는 변신의 전통을 그려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일본 역사 속에서 면면히 반복되어 왔다. 전국시대를 보라. 오늘의 패권 영주가 힘을 읽고 쫓겨나면 남게 된 여인네들이나 신하들은 이내 새로운 패자를 쌍수 들어 환영하고 있지 않던가.

이와 같이 시류 영합적 변천사를 그려 온지라 그들은 ‘오랜 저항’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라 잃은 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수그러들지 않던 우리의 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한편 이렇게 볼 때 현재 나날이 더해 가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니 탈아입미脫亞入美는 하등 이상할 바가 없다. 현재의 글로벌 슈퍼 파워는 아직까지 미국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한가락 한다는 고위 정객들은 4월 말에 5월 초까지 이어지는 ‘고르덴위크(Golden Week의 일본식 발음)’, 즉 일본의 황금연휴 기간에 소위 ‘의원외교’라는 명목으로 외국으로 향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이 향하는 곳은 대부분 당대의 패권국가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현지의 유력인들과 만나 서양인을 만나면 짓게 되는 일본인 특유의 어색한 ‘사진 찍기용 미소’가 담긴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와 대외적인 과시용 액자 속에 고이고이 모셔 둔다. 일본의 의원회관에 가보면 경쟁이라도 하듯 내건 이와 같은 사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정계의 이와 같은 모습은 대부분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오죽하면 일본 우익의 거물 이시하라 신타로는 『No라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 속에서 일본 사회에 만연한 대미종속적, 굴욕적 사고와 행태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고 나섰겠는가.

현재의 글로벌 세계에서는 많은 국가들이 G2로 부상한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 역시 2007년 처음으로 중국과의 수출입 규모가 미국을 앞지르면서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의존도가 점점 중요시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외교∙군사적으로의 대미 종속 현상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약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전통이란 게 어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으리오.

그 중 한 예로, 2005년의 황금연휴 기간 50여 명에 이르는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외국으로 떠났는데, 그중 42명이 미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씁쓸한 것은 미국의 정치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 의원들이 주로 꺼낸 화두란 게 다름 아닌 한∙일, 북∙일 관계와 중∙일 관계였다는 점이다. 한∙일 혹은 중∙일 간에 문제가 있으면 당사자인 우리와 만나 협의하며 해결하려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당사자들은 제쳐 두고 머나먼 2억만 리 제3자를 만나 토로하고 협의했다니…

이 대목에서도 일본의 대세주의적 영합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이 하는 일에 어디 영원함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꽃도 피고 나면 지기 마련이니 패자覇者와 패자敗者는 그 발음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을 제치고 새로운 패권이 등장하는 날이 오면, 일본은 항상 그랬듯 또다시 그 쪽으로 다가서려 할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가 그려 가는 21세기는 그들의 시류편승 전통이 쉽사리 적용될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의 고민과 ‘담장 걷기식 외교정책brinkmanship diplomacy’은 바로 이러한 달라진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게이샤노치까라(기생의 힘)’. 주군의 세도를 등에 업은 채 기고만장하던 그녀, 그러나 총애하던 주군에게 버림받는 날이면…이렇게 볼 때 동북아의 진정한 안녕과 질서,자존은 일본이 자명한 이치를 깨닫고 대오각성하며 악수일로惡手一路에 종지부를 찍는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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