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 한민족의 비애
재외 한민족의 비애
  • 우수근 콘코디아 국제대학 대외교류 부총장
  • 승인 2020.09.2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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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근의 한중일 삼국지

재중 교포와 재일 교포, 즉 ‘우리를 잘 아는 중국인’인 조선족과 ‘이쪽도 저쪽도 되기 힘든’ 재일 동포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양국의 한민족을 생각할 때면 ‘어쩌면 이렇게 상반된 삶을 살아 왔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떠오르게 된다.

중국에는 56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조선족의 사회적 지위나 생활수준은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다기 보다는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 등에 힘입어 오히려 우대받아 왔다. 또한 “우리 민족 특유의 성실함(조선족 김 모씨 표현)”으로 인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요로우며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해 왔다.

몇 년간에 걸친 일본 생활 속에서 알게 된, 차별에 점철된 재일 교포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되는 나는 조선족을 만나면 넌지시 ‘중국 사회에서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여부를 묻곤 했다. 그럴 때면 거의 한결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조선족 스스로 밝히기를 각 지역 공산당 조직의 최고직인 당서기는 한족만 될 수 있는 등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는 가운데서 당당하게 한민족으로서 우리말(그들은 ‘연변말’ 혹은 ‘조선어’라고 일컫는다.)과 우리 문화, 관습을 잘 계승해 온 것이다.

실제로 중국 생활에서 접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일상생활 모습이나 언행은 매우 당당하다. 그 속에서는 차별이라는 것이 느껴지질 않는다. 56개 소수 민족이 공존하는 중국의 특성상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소수민족 연대에 의한 항거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한족은 오히려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전개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손님 접대 방식 등에는 아직도 우리의 전통과 관습이 짙게 배어 있다. 우리 식을 굳이 감추거나 주류 민족의 그것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중국 내에서 조선족의 삶을 요약하면, 차별 없는 상태에서 한민족으로서 우리 것을 소중히 지키며 나름대로 존경받는 당당한 삶을 지내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족들은 스스로 당당하게 ‘중국인’ 이라고 밝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그들은 ‘우리는 조선 민족 출신 중국인’,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 민족’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우리는 중국인들인 그들을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므로 ‘당연히’ 우리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제멋대로의 생각 속에서 살아오질 않았던가.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조선족과 관련된 크고 작은 불상사 등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을 평범한 하나의 외국으로 인식해야 하듯 조선족도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인으로 인식해야 한다. 

조선족이 다른 중국인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와 언어, 문화, 관습을 공유하여 우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조선족에 대해 ‘중국을 잘 아는 우리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족에 대해 ‘우리를 잘 아는 중국인’ 으로 파악할 때 불필요한 오해와 마찰, 대립 등을 줄이며 서로의 ‘윈-윈’ 을 추구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해 비해 재일 교포들의 삶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차별과 고난 등을 빼놓고는 언급하기 힘든 재일 교포의 삶……,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 교포 가운데 약 50만 명은 해방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국 국적을 지닌 채 차별 받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재일 교포 변호사 김 모 씨에 의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출생시부터 일본식 이름을 짓고 일본 유치원과 일본 학교 등에 진학하며 일본어를 주된 언어로 체득하며 지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민족학교가 정규 학교로 인정되지 않아 대학 입학 고사 자격이 주어지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많은 재일 교포들은 자신들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기에는 가정 안에서의 나와 가정 밖에서의 나를 둘러싼 환경의 차이,즉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낸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일본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외국인 등록증을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커서는 공무원이 될 수 없고 회사에 취직할 때도 일본인보다는 더욱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차별에 시달린다. 취직 조건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거나 일본인과 결혼할 때도 일본 국적 취득을 요구받기도 한다. 아울러 그들은 세금은 일본인과 동일하게 납세하면서도 참정권에서 제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들에 대한 차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국이어야 할 한국에서도 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으며 한국의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도 아니어서 은행계좌 개설 등을 포함한 일상생활에서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은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가입도 어려운 실정이다.

이렇게 조국인 한반도와 거주국인 일본 양측에 끼인 채, 이쪽도 저쪽도 아닌 주변인의 삶을 살고 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이런 차별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재일 교포들은 스스로 차별당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일 교포 사회에서 느껴지는 ‘한민족의 비애’ 에 대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연히 알게 된 한 재일 교포 청년 이 모 군은 조총련 출신으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 건재한 그의 친조부모는 한국의 경상도 출신이며 아직도 당연히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북한 국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광복 전후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이 군의 조부모는 일본으로 건너오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런데 당시 차별이 극심했던 일본 사회에서 재일 교포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북한 쪽에서는 재일 교포들의 생존을 보호하고자 조총련 단체를 결성하였고, 그 당시 아직 남한, 즉 한국이 결성한 이렇다 할 단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부모님은 단체의 사회적 보호를 위해서 아들만을 북한 국적으로 바꾸어 주셨으니, 이 군의 부친이 바로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이렇게 되어 현재 이 군의 집에는 조부모와 고모, 사촌들은 한국 국적, 이 군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북한 국적으로 국적을 달리한 채 한반도의 남∙북 대립을 피부로 느끼며 살게 된다.

부모자식 관계와 형제자매 관계는 어느 집 못지않게 화목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2개의 조국이 서로 으르렁거릴 때면 그렇게 사이좋던 부모, 형제자매지만 그 어느 곳보다 찬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어 닥친다고 하니 이 기막힌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중국과는 달리 단일 민족임을 주장하기도 하는 일본 사회는 타민족에 대한 온갖 차별이 존재하였고, 그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더욱 마음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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