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권위와 도전'
한·중·일의 '권위와 도전'
  • 우수근 콘코디아 국제대학 대외교류 부총장
  • 승인 2020.08.2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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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근의 한중일 삼국지

우리나라에서는 직장이나 사회,혹은 법이나 정부 당국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형태로 각종 시위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를 두고 외국인들 중에는 “시위하는 모습이야 말로 한·중·일 3국 중 한국만의 모방할 수 없는 두드러진 특징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의 각종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항거는 과연 어떠한가?

먼저 일본을 보자. 현재의 일본은 각종 사회 운동과 관련하여 “지금의 일본은 노인사회이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매우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지 않으면 대세적 관심사에는 더 이상 나서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사회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니다.대부분의 일본인들도 국내외 정세와 이슈 등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문제의 심각성이나 사회적 파장 등을 나름대로 파악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실천에 가담하는 것은 기피한다.

1960년대 말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계속되었던 미·일안보동맹과 관련한 대규모 시위 이후 일본 사회는 직접적인 사회 참여도가 급격히 사그라져 지금에 이르렀다. 일본 사회의 이와 같은 급격한 ‘보수화’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예전 일본의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경제적 부유함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기본적 생계 문제에서 해방되면서 사람들이 보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라는 대아大我보다는 가족이나 나라는 소아小我중심의 사회로 변화한 것이다.이로 인해 일본인들도 일본의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에 대해 적지 않은 불평과 불만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거대한 시민운동단체 등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불만을 술안주쯤으로 대용하면서 “누군가 해 주겠지.” 하며 스스로 나서지 않고 ‘골치 아픈’ 일은 애써 멀리하며 방관하려는 경향이 있다.

너의 희로애락은 너의 것이요, 나의 것은 나의 것일 뿐이니 나타내거나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마라. 내가 큰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면 그 화살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 있으니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 나도 너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의 일에 간섭 말라. 이렇듯 개인주의가 가지는 원래의 의미와는 달리 왜곡된 일본식 개인주의가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심리 속에서 일본인들은 ‘NO’인 ‘YES’를 말한다. ”일본의 상식은 세계의 비상식이요, 세계의 상식은 일본의 비상식이다.”를 되뇌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풍토에 익숙한 일본인들은 그 ‘YES’가 ‘NO’임을 알지만 세계인들은 모른다. “일본인들의 ‘YES’는 ‘NO’를 의미한다!”는 클린턴의 분통 섞인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일본 사회의 특징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해 비해 중국의 모습은 어떨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언로가 제대로 트여 있지 않다. 중국인들은 중국 당국이나 공산당의 막강한 물리력에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파란만장한 문화 대혁명을 거치고 또 톈안먼 사태를 겪으면서 언제라도 재발이 가능한 유사시를 논의하며 스스로의 언행을 조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인들은 국가나 집권당에 대한 불만 토로에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이들 제도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항거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인터넷이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오늘날 중국인들이 국내외의 돌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중국인들도 우리들이 파악하고 있는 만큼 국제 사안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고, 국내 사안에 대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수단을 통해 서방사회가 파악하고 있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자기 집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사회 참여도가 저조하다는 점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비슷하나 그렇게 된 원인은 다르다는 점이다. 기본적 생계 문제가 없는 일본인들은 귀찮고 성가신 탓에 나서는 것을 스스로 꺼려하는 반면, 중국인들은 떡 버티고 선 중앙의 힘과 거미줄같이 촘촘히 드리워 있는 주위의 세포망들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중국 인민들도 자신들의 직접적 생계와 관련되어서는 관망의 차원을 넘어 힘을 합쳐 문을 박차고 나간다. 예를 들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상급 기관을 방문하는 ‘상소’의 일종인 ‘상방’이 있다. 상방으로 읍소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개발 과정에서 토지를 헐값에 빼앗긴 농민이나,국유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다.이들은 토지 수용 과정의 억압과 관리의 부패 등에 항의하는 것이다.

실제로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상하이 중심지의 택지개발지역에서도 위와 같은 일이 발생했었다.상하이에서 외국인이 밀집되어 거주하고 있는 구베이古北 지역에서 자전거로 5분도 안 되는 곳에서 발생한 한 시위는 고급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개발업자와 관할 구청 공무원의 검은 결탁으로 주민들이 손해를 입게 되어 초래된 것이다. 

나는 조깅 중에 그 주변을 지나치는데 우연히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가건물을 지어 기거하면서 주민들이 교대로 수개월 동안 비폭력 철야농성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 오는 어느 날, 그곳으로 통하는 도로가 무장경찰들로 인해 봉쇄되고 100미터 떨어진 그 철야농성 현장에서는 수백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든 채 고성을 지르며 경찰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중앙정부에서 감찰단을 파견하여 부정부패를 밝히고 연루자를 처단함과 동시에 그 개발업자에게 엄청난 철퇴를 날림으로써 결국 사태가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와 관련 주목할 만한 일은,중국 공산당이 인민들의 시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나섰다는 점이다.중국 공산당이 매우 민감한 중국의 국내 사안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인데,이는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인들,그 엄청난 인구가 뭉치게 되면 그 폭발력은 가히 엄청날 것이다.중국 당국도 이를 잘 간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당국은 중국인들의 단결과 이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대정부 폭발력을 우려하며 인민들의 모임에 민감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시위가 끊이질 않는 시위의 천국 한국, 그 한국의 불안정함에 고개를 설레는 한편 그 힘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무기력한 보수 노년대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역동성을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벤치마킹하고 있는 중국∙∙∙∙∙∙. 이렇게 볼 때,한국 사회의 불안정은 좀더 나아지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일 수 있으리라.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불안이 중국에서 꿈틀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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